토요일 아침,날씨가 좋길래 집안 대청소를 시작하였다.
겨우내내 손도 대지 않았었던 바깥쪽 유리도 닦고 창틀도 닦고 차고 청소도 했다.
뭐든지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서너시간을 멈추지 않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자꾸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었다. 다리가 떨리니까 몸도 아울러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끊고 마시지 않던 커피를 오늘 마셔서인가, 짐작을 하며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을 따르며 무심코 부엌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다 깜짝 놀랐다.
시계가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그러고보니 청소하느라 그때까지 아침을 안먹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다리가 떨렸었구나...

얼른 라면 한 개를 끊여 식탁에 앉는데 가슴이 먹먹해지고 기가 딱 막혀왔다.
아침 한 끼 안먹었다고 이렇게 다리가 떨리다니 아아, 이제 나도 늙어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랑 친하게 지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적게는 서너살, 많게는 예닐곱살 씩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녀들 특유의 신체노화에 관계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 그중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 나이가 들게 되면 배고픔을 못참게 되고 속이 비면 다리가 떨린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그까짓 밥 한 끼 굶었다고 설마 다리가 떨릴까, 나는 하루종일 굶어도 까딱 없더만."

그랬었는데 다리 떨리는 증상이 내게 찾아온 것이었다.
단 한 끼를 굶었을뿐인데......

며칠후 여러명이 만난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 나를 몰아 세웠다.

"거 봐라, 니가 만년 젊을 줄 알고 큰소리 쳤었지. 이제 너도 시작이군. 늙는 것, 진짜 눈 깜짝할 사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자가 늙어가는 데는 서너가지 증상이 있단다.

첫째는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아이들은 무조건 예뻐보이는 것이란다.
둘째는 장미같이 화려하고 요염한 꽃보다는 길가에 핀 들꽃같은 작고 초라한 꽃들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란다.
셋째는 아침 잠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란다.
넷째는 한 때는 그렇게 밉고 못마땅하던 올케가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란다.
다섯째는 남편이나 아이들보다는 친구들이랑 만나 밥먹고 수다떠는 게 더 좋아지는 것이란다.
대충 위 다섯가지 증상이 생긴다면 여자가 늙어가는 징조라고 하였다.
그녀들의 말을 들으며 가슴속으로 꼽아보니 이 다섯가지가 모두 지금 나한테 해당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늙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겨우 사십대 초반일뿐인데 말이다.

그 후 며칠동안은 참 우울했고 가슴이 텅 빈 것 같이 허허로왔다.
늙음이, 세월이 나를 결코 비켜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다 늙어도 나만은 안 늙을 줄 알았었다. 늙음이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긴줄 알았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눈 떠보니 늙음은 바로 내 코 앞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가수 조영남 씨와, 패티 김씨, 그리고 이미자 씨의 사진이 나란히 나온 신문을 보다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신문에 나온 이미자씨의 고운 자태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미자씨는 별로 예쁘지 않은 사람이었다.그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목소리에 비해 참 아름답지 않은 얼굴을 이미자 씨는 가지고 있었다.
"이미자 씨가 천상의 목소리와 함께 얼굴마저 고왔다면 그 것만큼 불공평 한 게 어디 있을까? 신도 참 얼마나 힘들었겠어. 모두에게 골고루 은총을 내려주시느라고"
20여년 전, 서울역에 설치된 텔레비젼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이미자 씨를 보면서 누군가가 툭 던진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 이미자 씨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매우 기품있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진 속에서 이미자 씨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금테 안경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이미자씨에 비해 패티 김 씨는 베레모(나이 일흔다섯에 베레모라니!)와 짙은 화장으로 여전히 멋을 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으나 멋도 젊었을 때 말이지, 이미자 씨의 품위있는 모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보였다.
패티 김 씨가 화려한 공작새라면 이미자씨는 고고한 학 같았다.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늙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젊어 보이려고 애쓴(발악을 한 것 같은) 흔적이 뚜렷한 가수나 여배우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 없다. 특히 뛰어난 미모로 한때를 풍미하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최근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혐오감마저 들 정도이다.
노인네가 웬놈의 화장은 그리 광대처럼 짙게 했는지,그리고 그 뚱뚱한 몸에 어울리지도 않게 웬 보석들은 그리도 많이 휘감았는지.
그녀를 볼 때마다 왜 저리 천박하게 늙을까,하는 생각을 늘 했었었다.

그래, 바로 이것이구나!

나는 무릎을 쳤다.
곱게,그리고 품위있게 늙는 것!.

이왕 나이를 먹어야만 한다면, 늙음이 피할수 없는 숙명같은거라면, 나도 이미자 씨처럼 늙고 싶은 생각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요 며칠동안 나를 괴롭혔던 늙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신문에 실린 이미자 씨의 사진 한장으로 깨끗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나는 목주변에 새로 생긴 주름살을 거울에 비춰보며 되뇌어 본다.

곱게 늙어야지...

이민 17년의 주부가 쓴 미국 생활 이야기가 http://kyesook.com 에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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