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주 (1939년 11월 15일 ~ 1980년 3월 6일/ 41세에 사형)


1. 서울고 -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학생 시절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음 

2. 육사 성적이 우수했고 6사단에 배치되자마자 관측장교 보직을 건너뛰고 바로 전포대장에 보임됐다

3. 전포대장 보직을 마치고 6사단 사단장의 전속부관이 됐는데 이때 그의 인생이 결정됐다... 바로 6사단 사단장이 '김재규'

4. 이때부터 박흥주는 김재규를 따르기 시작했고 김재규는 박흥주를 아꼈다.

5.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박흥주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가 되었다 

6.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부장의 최측근인 중정부장 수행비서였음에도 청렴함을 잃지 않아 성동구 행당동 산동네의 판잣집에서 거주했다 (당시에도 공무원 월급은 박봉이였다. 아니 지금보다도 훨씬 더 박봉으로 일반 회사원들과 임금격차가 더 심했다 이것은 중정부장 수행비서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그렇기에 공무원 봉급 만으로는 살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 이후 박흥주 사형 집행 후 장세동이 유족들에게 연금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냐고 전두환에게 보고를 올렸다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7. 김재규의 10.26이 실패로 끝나며 김재규가 체포되면서 박흥주 자신도 죄인이 되자 그는 교도소 벽에

士爲知己者死 (사위지기자사 : 선비는 자기의 인격을 알고 존중하여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려 그 지우에 보답한다)를 적었다

8. 김재규는 박흥주, 박선호등 자신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내 부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부하들이 사형 만큼은 피하길 바랬으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9. 근무지가 중앙정보부였지 신분은 육군대령이였기에 총살로 최후를 맞는다. 총살대에 묶인 후 하늘을 보고 싶다며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했고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육군 만세를 외치고 사망했다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우는 두 딸의 모습



그의 유서


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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